생 제르망백작 이야기

2006. 10. 29. 18:27미스테리

글 출처 : http://www.orbi7.com/bbs/zboard.php?id=pls_amu_imported&sn1=&divpage=5&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084

그림 출처 : http://blog.naver.com/cupidonie

 

 

위의 그림은 생제르망성당(18세기 건축)

프랑스의 생제르망 백작은 지금도 유럽에서는 불로불사의 인간으로 간주되며 여러 가
지 신비한 일화를 많이 남기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출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아직도 그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
고 있는 사람도 있다.

※생 제르망 백작.. 국적은??

출생에 관하여 일부의 사람들은 그가 프트란실바니아의 지
배자였던 프란시스 라코치 2세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또 스페인 찰스 2세의 미망인이
낳았다든지, 포르투갈의 유대인의 아들이라는 등등의 설이 분분합니다..
물론 입증될만한 증거는 없지만..

백작을 자칭하였던 그는 1740년 경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던 전력이 있고
1750년 대에 루이 15세와 그의 정부인 마담 퐁피두와의 사귐으로 사교계로 진출하였다고 합니다.


※생 제르망 백작은...


생제르망 백작은 학식과 재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났다고 알려진다.
바이올린 연주나 화가, 연금술, 화학 등등의 다양한 재주를 과시하여 일약 사회적인 명사가 된 그
는 특히 연금술로 만들어낸 보석을 뭇 여성들에게 아낌없이 뿌려대 신망을 얻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 제르망 백작의 연금술에 대하여..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생제르망이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런던 연대기>에는 '불가사의한 이방인에 관한 일화'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탁월하고 고귀한 연금술사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독일에서 프랑스로 왔다. 그는
비밀의 가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만능약이기도 했다. 이 이방인이 금을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의 지출이 이러한 소문을 뒷받침했던 것 같다. 소문
이 커지자 당시의 프랑스 대신이 이를 의심하여 그의 비밀을 밝히려 했다. 그는 생제
르망이 어디로부터 송금을 받고 있는지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 현자의 돌
이 어디서 생기는지 그 출처를 곧 알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비밀
을 밝히려는 그 고관의 의도는 매우 사려 깊고 현명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수수께끼만
더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 그렇게 2년 동안 감시하였지만, 생제르망은 평상
시와 같이 생활하며 모든 것을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그 동안 프랑스에 있는 그에게
들어온 송금은 일체 없었다."


연금술 외의 생 제르망 백작의 능력..


생제르망은 일부 귀족들 앞에서 변성실험을 하여 보통의 주화나 은화를 금으로 변화시
키기도 하고, 왕이나 외교관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며 큼직한 다이아몬드와 보석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파리의 자택에서 마련한 연회에서는 보석을 디저트 접시에 담아
참석한 귀족들에게 선물로 주었다고도 전해진다. 한번은 어떤 공작부인의 청에 못이겨
생명의 약이 든 작은 병을 주었는데, 그것이 술인줄 알고 마셔버린 하녀가 몰라보게
젊어졌다는 믿기지 않는 에피소드도 있다.



※생 제르망 백작 이후의 기록들.

라모아 제르지 백작부인의 회상록에 의하면, 1710년 무렵 베네치아에 있던 생제르망의
나이는 50세쯤으로 보였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1660년경에 출생한 것이 된다. 그런
데 그는 1737년에서 1746년 사이에 페르시아와 영국, 빈 등에 머물렀다. 8, 90세는 되
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1749년에는 파리에 도착하여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만났으며, 1756
년에는 인도에서 목격되었다. 1762년에는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쿠데타에 참가하고, 이
후로는 프랑스의 샹보르성에서 연금술과 화학실험에 종사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그
리고 1768년에는 베를린에 있었고, 그 다음해는 이탈리아, 코르시카, 튀니스를 여행하
였으며, 1770년에는 러시아 해군이 이탈리아에 입항했을 때 오를로프 백작에게 초대를
받기도 했다. 이때 그는 러시아 장군 복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1770년대에는 독일에
체류하면서 샤를 왕자와 함께 프리메이슨과 장미십자단 일에 종사하였으며, 1780년에
는 런던의 왈시 사가 생제르망의 바이올린곡을 출판했다.
독일의 에케른푀르데의 교회에는 "소위 생제르망 및 웰돈 백작. 1784년 2월 27일 사
망. 3월 2일 매장"이라는 기록이 있다. 1710년에 50세로 보이는 생제르망을 보았다는
라모아 제르지 백작부인의 말을 믿으면, 그는 124세 정도에 죽은 셈이 된다.
그런데 그 다음해 그는 어떤 프리메이슨 모임에 출석하고 있다. 또 한 백작부인은
1821년에 그를 빈에서 만났다고 말했으며, 주 베네치아 프랑스 대사도 그후 산마르코
광장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생제르망의 친구이자 제자인 헤세 카셀의 샤를 왕자는 그의 저서에서 "지금까지의 철
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로 생제르망을 추켜세웠으며, 주브뤼셀 오스
트리아 대사인 코벤츨도 그를 높이 평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존경할 수 있는
결백하고 착한 영혼의 소유자" 라고 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생제르망을 "이해할
수 없는 남자" 라고 말하였으며, 프랑스의 볼테르는 생제르망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
고 있는 사람", 그리고 "결코 죽지 않는 남자" 라고 평하였다.


생 제르망 백작의 관하여 아직도 여러가지 문헌에서 다루고 있습니다만은
누구도 생 제르망 백작의 존재와 일어난 일들을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1970년 프랑스 공영방송 1에서 샤를 샹프레라고 하는 남자가 자신이 생 제르망 백작이라고 주장하면서 TV에 나온 일이 있었는데 사실 그는 가짜로 밝혀져 사기혐의로 수감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형이 끝나고나서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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